2009년 03월 11일
다윈의 진화론과 종교
<종교와 평화> 24호, 2009.3.1
다윈의 진화론과 종교
김윤성
진화론에 대한 상이한 종교적 입장들
150년 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래, 진화론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물론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다. 진화를 막연한 가설이 아닌 확실한 사실로 만들어줄 좀 더 충분한 증거들이 쌓이기까지는 수십 년이 더 걸렸고,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설명은 20세기 들어 다윈의 자연선택 법칙과 멘델의 유전 법칙을 결합한 신-다윈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어쨌거나 그 후로 지금까지 더 많은 증거들이 쌓이고, 미시적인 유전자 차원에서 거시적인 생물권 차원에 걸친 다양한 이론이 축적되면서,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의 역사에 관한 확고한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종교들은 오래 전부터 생명을 포함한 존재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강력한 설명틀을 제공해 왔고, 따라서 진화론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설명틀의 출현은 종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반응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 반응은 동양종교들과 서양종교들에서 때로 비슷하게 때로 다르게 나타났다. 서양종교들이든 동양종교들이든, 진화론을 처음부터 선뜻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그러나 동양종교들은 진화론을 금세 수용하는 유연함을 보인 반면, 서양종교들은 진화론을 수용하는 유연한 입장이 꽤 일찍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을 거부하는 완강한 입장도 지속되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같은 동양종교들은 대체로 진화론과 별 마찰을 빚지 않지만, 서양종교들은 사정이 양분되어서,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 주류 교파들을 중심으로 한 대개의 그리스도교 진영과 유대교 교파들은 진화론을 수용하는 반면 대다수의 무슬림들이나 근본주의적인 소수의 유대교와 개신교 교파들은 (개신교의 이런 흐름은 세계적으로는 소수지만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다수다) 진화론을 강력히 거부한다.
이런 차이는 일단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견해와 경전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동양종교들처럼 궁극적 실재를 인격성과 무관한 우주적 법칙으로 본다면, 생명의 출현과 전개가 비인격적인 진화의 법칙에 의한 것이라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반면 서양종교들처럼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신으로 본다면, 전능한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비인격적인 진화의 법칙과 조화시키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또 동양종교들처럼 경전을 단지 진리에 이르는 방편으로만 여긴다면 그 내용이 진화론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반면 서양종교들처럼 경전을 신의 말씀 자체로 여길 경우 그 내용이 진화론과 상충된다면 이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서양종교들에서는 한편으로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신을 초월적이고 전능한 존재로 보고 또 경전을 그러한 신의 말씀을 담은 절대적 진리로 보아 진화론을 거부하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견해에 따라 신을 인격성과 비인격성, 초월성과 내재성, 전능성과 불완전성을 겸비한 존재-겸-원리로 보고 또 경전을 신의 말씀 자체가 아닌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로 보아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이 갈리게 되는 것이다.
상이한 입장들의 역사적 맥락
물론 이런 차이가 꼭 어떤 종교의 진위나 우열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진위나 우열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뿐더러, 종교들의 과학 수용 여부나 정도가 그런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차이는 교리적이기보다는 역사적인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서양과학의 맥락에서 출현한 만큼 서양종교인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처음부터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했다. 19세기 중반 이제 막 출현해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했던 진화론에 비하면 그리스도교가 지닌 2천 년 전통의 힘은 막강했다. 따라서 처음에는 유연한 신관과 경전 이해를 지닌 소수의 자유주의적 개신교를 제외한 가톨릭, 성공회,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와 유대교 교파들이 진화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한 세기 반 동안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고,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소수의 근본주의적 교파들을 제외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진영 대부분이 진화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한편 서양종교들 중 이슬람교와 다양한 동양종교들이 진화론과 만나게 된 것은 진화론이 출현한 후 한참 지나서의 일이다. 이들이 진화론과 만난 것은 20세기 들어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서양과학이 비서구 사회로 확산된 덕분이었고, 그렇게 접하게 된 서양과학 속에서 진화론은 이미 생명의 진화에 관한 확고한 설명틀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여기서 이슬람은 서구에 대한 반감, 전통적 유일신관, 그리고 경전에 대한 문자적 태도 때문에 진화론을 계속 거부해온 반면, 동양종교들은 동서양의 조화를 추구하고,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 원리로 파악하며, 경전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지닌 덕분에 이미 확립된 진화론과 비교적 무난히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서양종교들은 진화론이 확고한 이론으로 확립되어 가는 지난한 과정과 처음부터 궤적을 같이 했기에 이와 충돌하거나 조화를 이루는 역시 지난한 과정을 겪어온 반면, 동양종교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짧았거나 거의 없었기에 충돌의 가능성 자체가 처음부터 낮았던 것이다. 진화론 수용 여부에서 종교들 간에 차이가 나는 것은 교리적 진위나 우열보다는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의 차이 때문이다.
시간의 깊이와 인간의 겸손
종교들이 진화론을 어떻게 수용하거나 거부해왔는지 그 세세한 내용을 살피자면 이는 매우 길고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이 짧은 글에서 이를 다 펼쳐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진화론이 종교와 관련해 어떤 문제를 던져주는지에 대해서만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하겠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화론이 열어준 광대한 시간의 깊이다. 확립된 과학적 설명들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고, 태양계와 지구의 나이는 45억년, 지구 위 생명의 역사는 35억년이다. 우주 차원까지 확대하지 않고 생명의 역사만 보더라도 35억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광대한 시간이다. 더욱이 이 기나긴 시간의 대부분은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생명체와 이보다 아주 약간만 더 복잡해진 단세포 생물의 차지였고, 그 뒤를 이어 갈수록 좀 더 복잡해진 생명체들이 갈수록 점점 더 짧은 시간을 차지하며 생명의 역사의 한 장씩을 채워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가 가장 늦게 출현해 가장 짧은 시간을 살아오고 있다. 인류보다 연륜이 훨씬 오래된 다른 수많은 생명체들과 나란히 말이다. 게다가 다시 우주 차원으로 시야를 확대해보면 137억년의 우주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란 그야말로 거의 찰나에 가깝다.
우주와 생명의 역사가 지닌 이런 광대한 시간에 비하면 찰나적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하염없이 작고 초라하다. 설령 인간이 이 세상에서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알고 그 시간의 깊이를 아는 유일한 생명체라고 해도, 우리는 우주와 생명의 그 광대한 시간의 깊이 앞에서 그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동양종교들처럼 생성소멸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을 말하든, 서양종교들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신적 시간의 영원성을 말하든, 공통된 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지닌 종교들이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시간의 깊이 앞에서 겸손하라고 가르쳐 왔다는 사실이다. 진화론은 그 시간의 깊이를 좀 더 깊게 해주거나 새롭게 들여다보게 만들어주었고, 이는 인간에게 전보다 더 진지한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우연과 고통을 넘어서
진화는 그 자체로 아무런 필연성도 목적성도 없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과정의 연속이다. 우연은 다윈 진화론이 막강한 경쟁 이론이었던 라마르크 진화론과 크게 차이나는 부분인데, 라마르크 식으로 보자면 진화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한 필연적 결과다. 그러나 라마르크주의는 다윈주의에게 이미 오래 전에 패배했다. 획득형질의 유전으로는 진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종의 변이에서 새로운 종의 출현과 소멸에 이르는 진화의 전 과정에서 작동하는 것은 단지 우연뿐이다. 환경 변화에 적응한 생명체들이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생겨난 변이들 중에서 달라진 환경에 적합한 생명체들만 그저 우연히 살아남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견해는 중대한 종교적 문제를 제기한다. 종교들은 세상의 그 무엇도 우연한 것은 없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와 사건은 업보와 인연의 결과이거나 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궁극적 바탕에는 다르마나 신 같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우연과 무작위성 이외의 다른 어떤 원인도 상정하지 않는 진화론과 모든 것의 근본 원인으로서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종교는 과연 조화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실제로 종교들은 이 물음에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해왔다. 그 한 가지는 우연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피상적 현상일 뿐이고 그 너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적 원인으로서 다르마나 신 같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말하는 종교들다운 해답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이런 해답을 받아들이기에는 진화의 과정을 지배하는 우연과 무작위성의 힘이 너무도 현저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종교들은 인연이나 신의 섭리의 필연성에 관한 교의에 우연성에 대한 통찰을 접목하려고 시도하기도 해왔다. 인연은 단지 필연의 연속이 아니라 필연과 우연의 교차이며, 창조를 향한 신의 뜻은 우연의 여지를 허용할 만큼 넉넉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우연에 대한 생각은 인연이나 창조의 교의를 좀 더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우연으로 점철된 진화 이야기는 행복의 드라마가 아니다. 생명의 역사는 생존과 성공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고통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해야 하며, 살아남는 데 성공한 극소수의 개체와 종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생명체는 고통을 겪다가 결국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떤 생명체가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는 엄청난 고통과 소멸의 상처투성이의 과정을 거친 결과일 뿐이며, 또 현재의 지속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생명체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물론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는 고통과 소멸로 가득한 생명의 역사에서 어쩌다 주어진 지속의 행운 잠시 누리고 있는 것일 뿐이며, 우리는 역시 고통과 소멸로 가득한 인류의 역사에서 어쩌다 주어진 행복의 순간을 잠시 누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 지속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인류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 속에서 고통과 소멸을 겪어왔고, 겪고 있으며, 앞으로 겪게 될 다른 사람들과 뭇 생명체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우리의 지속과 행복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저들의 소멸과 고통을 대가로 주어진 분에 넘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과정을 가득채운 소멸과 고통에 대한 이런 생각은 종교들이 오래전부터 가르쳐온 자비와 사랑의 정신을 더욱 심화시켜준다.
생명의 다양성과 종교적 다양성
특정 종교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자의 이야기가 주로 불교와 기독교에 국한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가 두 종교만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종교들에 비해 불교와 기독교에서 진화에 관한 논의가 좀 더 활발히 이루어져왔기에 이들의 논의를 많이 빌려왔을 뿐이다. 두 종교는 궁극적 실재를 우주적 원리로 파악하거나 인격적 신으로 파악하는 상이한 유형의 종교들이 진화론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비슷하거나 다른 해답을 제시해왔는지를 살피는 데 필요한 쓸모 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반드시 똑같지는 않겠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도 진화론과 종교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진화론과 종교에 관한 마지막 문제가 제기된다. 바로 생명의 다양성과 종교의 다양성이라는 문제다.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들 간의 급진적 평등주의를 제시한다. 비록 진화가 단순에서 복잡으로 이행해오기는 했지만, 이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간의 축을 따른 단선적인 진보의 과정이 아니다. 생명의 진화는 진보에 의한 고양이라는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수평적 확대의 방향으로 펼쳐져왔다. 생명의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보고 인간을 진보의 정점이자 완성으로 보는 생각은 단지 인간 중심적인 편견이자 오만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 위에 군림하는 대신 생명의 연속성과 생명체들 간의 연대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지녀야 한다. 인연의 사슬 위에 피어난 섬광 같은 계기이든, 아니면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결과이든, 인간의 지성이 생명의 세계에서 매우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체들 중 유일하게 지성을 갖게 된 존재로서 인간에게는 생명의 연속성과 생명체들 간의 연대에 대한 감각과 인식 속에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고 다른 생명체들을 돌볼 책무를 지니고 있다.
또 진화의 역사를 가득 채운 생명의 다양성만큼은 아니어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 역시 종교적 다양성으로 가득하다. 자기네 종교가 역사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방식으로 주어졌으며 따라서 그것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보는 견해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대개의 사람들은 종교들이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각 지역과 문화의 독특한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생겨나고 변화해 왔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진화론은 바로 이런 생각에 깊이와 폭을 더해준다. 진화론은 종교들이 지닌 역사적 다양성을 우주와 생명의 더 광대한 역사 속의 한 장으로, 짧지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으로 만들어준다. 이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고 나름의 삶을 꾸리는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종교들이 생물학적 진화와 역사적 변화의 연속체 안에서 생겨난 다양한 산물들이라면, 생명체들 사이에 우열이 없듯이 종교들 사이에도 우열이나 진위란 애초에 있을 수 없다. 이렇듯 생명 세계에 관한 진화론의 급진적 평등주의는 종교들 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끌어안는 급진적 평등주의를 향한 길을 열어준다. 게다가 그 차이와 다양성은 단지 종교의 종류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비롯해 종교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차이와 다양성도 포함된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체들이 겪는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그 종교의 종류가 무엇이든, 신을 믿든 안 믿든, 종교가 있든 없든, 그들은 모두 생명과 인류의 역사가 미래를 향해,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조금은 바람직하게 되어갈 수도 있을 그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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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3/11 00:27 | 종교 읽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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