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제목의 횡포. 크리스토퍼 레인 <만들어진 우울증>(한겨레, 2009)

포스팅 한 지도 너무 오래되고 해서, 서점 뒤적이다가 잠시... <만들어진 우울증>이라... 흠... 확 땡긴다.

크리스토퍼 레인, <만들어진 우울증: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이문희 옮김, 한겨레출판사, 2009년 11월.



수줍음이나 불안 같은 인간의 특이한 감정을 둘러싼 정신분석학계와 신경정신학계의 싸움, 다시 말해 심리치료와 약물치료의 싸움. 예의 짐작대로 승리는 결국 신경정신학계의 약물치료가 거머쥐어왔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책으로, 약물치료가 불가피한 정신질환도 있음을 일단 인정한 후에, 그래도 수줍음이나 불안 같은 특정한 심적 상태는 결코 정신질환이 아니며, 약물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수많은 실증 자료를 통해 파헤치고 있다. '질병이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테제를 정신적 질병에 초점 맞추어 구체적으로 풀어낸 책인 셈인데, 한 마디로, 수줍음이나 불안 같은 평범한 심적 상태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하는 건 결국 정신의학계와 제약회사의, 의료권력과 자본의 술책일 뿐이라는 말씀. (여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악랄한 보험자본은 보상대상 질병목록에서 정신관련 질환은 철저히 배제한다.) 일단 장바구니에 담기는 했고, 방학 때나 어떻게 한 번 사서 읽어볼 요량인데, 아무튼 기대되는 책이다.

그런데... 번역서 제목이 좀 그렇다.
원서제목은 <수줍음: 어떻게 정상적인 행동이 병이 되었나>(Shyness: How Normal Behavior Became a Sickness)인데, 이게 번역서에서는 <만들어진 우울증: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로 되어 있다. 혹시 역자가 직접 번역서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이라면, 아마도 역자 본인이, 또는 출판사측에서 맘대로 지어서 갖다 붙인 거라면 출판사 측 담당자들이, 필경 우울증으로 고통당해본 적이 없거나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수줍음'과 '우울증'은 가히 비견하기 힘들 정도로 성격이 전혀 다른 심적 상태다. 수줍음의 질병화는 의료권력과 자본의 횡포일 수도 있지만, 우울증의 질병화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일정 정도의 우울증은 심리치료, 명상, 산책 등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고 치료될 수도 있지만, 극심한 불안, 공황장애, 대인기피, 자살충동을 수반하는 심각한 우울증은 이런 심적 치료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들며, 약물치료가 큰 도움이 되거나 때로는 불가피하다. 물론 약물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절한 때에 심치 치료와 더불어 적절한 양의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것은 우울증 치료에 큰 도움이 되며, 때로는 자살 같은 극단적인 결과를 예방할 수도 있다.

그래서 든 생각.
맞다. 질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면이 크고, 정신적 질병도 그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수줍음'을 '우울증'으로 고쳐서 번역서 제목을 짓는 과정에 혹시라도 출판사의 의도가 개입했다면, 거기서부터는 이제 출판운동의 이념이나 출판자본의 횡포가 끼어든다. 자살이 만연한 우리 사회, 자살을 흔히 우울증과 관련짓곤 하는 의학계와 언론 그리고 대중. 분명 문제 있는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편승해, 원서의 제목을 바꾸어가면서까지 '우울증은 만들어지는 거다'고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리 순수하지 못해 보인다. 이게 질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테제를 밀어붙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출판운동의 이념 과잉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 혹시라도 자살과 우울을 말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술책이었다면, 그건 출판자본의 탐욕이다. ,만들어진 우울증>이라는 제목이 혹시라도 우울증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심리치료로 충분하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어서 약물치료를 불신하고 거부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더 심한 우울증의 나락에 빠뜨리고, 극단적인 경우는 자살로까지 내몰게 되지는 않을는지 염려스럽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감정이, 마음이 질병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이 책 자체는 무척 흥미롭고 기대되는 바이다.

by 제이쌍스 | 2009/11/07 09:26 | 책꽂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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