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신화학, 낭만적 몽상에서 비판적 직시로. 링컨, <신화 이론화하기> 책꽂이

<교수신문>(2009.9.21) 저역자가 직접 쓰는 책 소개

신화와 신화학, 낭만적 몽상에서 비판적 직시로  by 김윤성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한때 신화는 ‘성스러운 이야기’였다. 적어도 20여 년 전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1906~1986)가 세계적 인기를 누리던 당시엔 꽤 많은 이들에게 그랬고, 적지 않은 이들에겐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엘리아데와 그 독자들에게 신화란 우주와 인간을 있게 한 태초의 시원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서, 거듭 공연됨으로써 우주와 인간을 태초로 회귀시켜 재생시키는 성스러운 드라마, 즉 의례의 대본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신화의 성스러운 후광은 바랬다. 세상이 세속화되어서가 아니다. 불변의 본질적 실체로서 성스러움은 없다는 생각이 힘을 얻은 탓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엘리아데의 후배 동료인 시카고대 종교학자들만 보아도 충분하다.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에게 신화란 이상과 현실의 틈새로 인한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려는 일상적 담화 놀이다. 엘리아데를 독창적으로 계승한 덕에 엘리아데 석좌교수가 된 웬디 도니거(Wendy Doniger)조차도 신화란 특정 집단에게 성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시카고대 종교학자 3인방 중 가장 막내인 50대 후반의 브루스 링컨(Bruce Lincoln)은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성스러움에 관한 엘리아데식의 존재론, 스미스식의 인식론, 도니거식의 수용론을 다 거부한다. 그의 입장은 굳이 부르자면 성스러움의 권력론쯤 되겠다. 그는 엘리아데의 제자지만,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람시, 바르트, 푸코 등을 취하면서 낭만적 몽상가인 스승의 그늘을 벗어났다. 그는 엘리아데가 청년 시절에 루마니아 우파 민족운동에 가담했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인 자신의 생각을, 유대인 제자의 말을 경청해준 따뜻한 스승으로서 기억하고 존경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지 스승으로서뿐 학문적 멘토로서는 아니다. 링컨은 엘리아데의 학문에서는 아무것도 배운 바도, 취할 바도 없다고 씁쓸히 고백한다.

스승 엘리아데와 제자 링컨의 차이는 링컨이 신화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신화란 ‘서사 형식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짧지만 빛나는 이 문구에는 분류체계에 대한 뒤르케임과 모스의 통찰, 허위의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지배와 저항의 헤게모니에 대한 그람시의 감각, 대립쌍의 향연인 사고 구조를 꿰뚫는 레비스트로스의 시선, 이차적 의미작용의 기호체계를 파고드는 바르트의 기민함, 권력과 담론의 그물코를 파헤치는 푸코의 열정이 모두 녹아있다. 링컨의 이런 신화 이해가 신화를 성스러운 이야기로 보는 엘리아데의 낭만적 신화 이해와 만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둘 사이의 심연에는 다리가 없다.

링컨의 책 <<신화 이론화하기>>는 서사 형식의 이데올로기로서 신화 텍스트를 분석하고, 동시에 그런 텍스트를 다루는 또 다른 서사 형식의 신화로서 신화학의 역사를 해부하는 더블플레이다. 1부에서 링컨은 우리를 고대 그리스인들의 텍스트로 초대한다. 빽빽한 텍스트 숲을 누비며 단어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가는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지만, 사실 그의 논의는 매우 단순하다. 뮈토스와 로고스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본래부터 비이성과 이성 따위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는 오랜 담론 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느린 변화 결과다. 이 과정을 추적하는 그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이성의 진보 덕에 로고스가 뮈토스를, 이성이 비이성을 이겼다는 식의 근대주의적 승전보 따위는 던져버리게 된다.

2부에서 링컨은 근현대 신화학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신화학은 그 연구대상인 신화만큼이나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게 그의 논지다.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하면서 신화가 민족 정체성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이렇게 재발견된 (날조된) 신화는 자민족중심주의와 인종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림 형제의 민담학과 바그너의 오페라와 저술을 비롯한 숱한 신화와 신화학 담론이 링컨의 손안에서 그 은밀한 이데올로기를 폭로 당한다. 이어서 링컨은 니체에게서는 훗날 나치가 반기게 될 아리아주의의 원형을, 동양학자 존스에게서는 단일한 인도-유럽에 대한 착각을, 신화학자 뒤메질에게서는 우파주의와 반공주의를 들추어낸다.

3부의 첫 장에서 링컨은 좀 더 최근의 신화학을 개관한다. 그는 엘리아데에 대해서는 잠시 예우를 표한 뒤 접어두고, 대신 레비스트로스에 주목한다. 그의 구조적 방법은 계급, 젠더, 인종의 차이에 대한 감각과 이데올로기 작용에 대한 통찰로 보완하면 꽤 유용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이어서 그는 고대 아일랜드 서사시에서는 젠더를 자연화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고대 그리스 텍스트에서는 사상 그룹들 간의 위계 다툼을, 고대 점술 텍스트에서는 종교 집단들 간의 경쟁을, 고대 북유럽 서사시에서는 상업자본주의의 전조를, 고대 조로아스터교 경전에서는 피억압자의 목소리를, 그리고 존스에게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욕망을, 또 그 주변의 인도인들에게서는 유쾌한 전복과 저항의 몸짓을 읽어낸다.

시대와 지역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링컨의 분석을 따라가는 것은 고되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따르는 즐거운 책읽기를 약속한다. 특히 흥미로운 건 결론에서 ‘신화로서 학문’을 논하는 부분이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학문 역시 신화, 즉 서사 형식의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그것은 각주 달린 신화다. 각주를 사기극의 수단으로 삼거나 아니면 각주를 지식 횡포로 매도하여 치워버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은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각주와 학문성에 대한 링컨의 논평은 통렬하다. 각주의 역할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각주로 사기를 치거나 각주로 학문의 진정성을 지켜내는 상반된 사례들에 대한 분석은 학문에 필요한 정직성, 성실함,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준다.

<<신화 이론화하기>> 읽기는 강 건너기다. 일단 한 번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강. 물론 꼭 건너가야 할 당위는 없다. 싫으면 돌아서면 그뿐이다. 상상, 꿈, 실존, 의미, 성스러움 같은 기표들이 넘실대는 신화 정원의 낭만적 풍요는 등 뒤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낭만적 신화 담론의 달콤한 향취에 신물이 났다면 과감히 링컨과 함께 강을 건너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링컨은 번역한 것은 이 책이 두 번째다. 나는 엘리아데를 통해 종교학에 입문했지만 마르크스와 푸코를 읽으며 링컨을 만났다. 그리고 그를 따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나 지금은 강 저편의 지난날보다 이편의 지금이 더 행복하다. 낭만적 몽상은 추억이 되었지만, 강 이편에서 이제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냉철한 직시의 즐거움을, 정직하고 성실한 분석의 흥분을, 학문하기의 진정한 열락을 비로소 맛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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